DeFi 열풍은 한때 DeFi 시장 내 TVL을 180조원까지 끌어올렸다(조사 시점 기준). 블록체인이 완결성을 보증하며 중간자 없이 '결제'가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고, 이로 인해 TradFi(Traditional Finance, 제도권)의 중앙집권적인 구조에서 벗어나 금융이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러한 DeFi 시장의 기축통화는 이더리움보다는 USD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이었다. NFT와 같은 이더리움 고유의 생태계 내에서는 이더리움이 기축통화로 자리잡았지만, 금융이라는 생태계는 아직 기존에 익숙한 법정통화를 기준으로 결제가 이루어졌다. 탈중앙금융 시장의 주요 결제 수단이 중앙화된 법정통화인 것이다. 이 부조리를 해소하려던 여러 시도 가운데,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 ESD(Empty Set Dollar)의 사례는 기계적인 알고리즘과 인간적인 DAO가 충돌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법정화폐 기반 — USDT, USDC

USDT와 USDC는 대표적인 법정화폐 기반 스테이블코인으로, 1 USD를 은행에 입금하면 스테이블코인 1개를 발행해준다. 중앙기관인 Tether사(USDT의 경우)와 Circle사(USDC의 경우)가 1 USD의 입금을 확인한 후 1개의 USDT/USDC를 발행해주는 구조다. 이렇듯 예치된 USD 법정화폐와 1:1 비율로 존재하며, 1 USDT 혹은 1 USDC를 반환하면 1 USD를 돌려받을 수 있고 반환된 스테이블코인은 파기된다.
문제는 집중도다. 이 두 개 기관이 발행한 스테이블코인이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다(조사 시점 기준). 탈중앙금융의 결제 인프라가 사실상 두 개의 중앙화된 회사 위에 서 있는 셈이다. 발행과 상환의 모든 과정이 해당 기관의 신용과 은행 예치금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 구조는 DeFi가 벗어나고자 했던 중앙화된 신뢰 모델을 그대로 다시 불러들인다.
해결책: 암호화폐 기반, 알고리즘 기반 스테이블코인

DeFi가 중앙기관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담보와 페그 유지 방식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유형 | 대표 사례 | 페그 유지 방식 |
|---|---|---|
| 법정화폐 기반 | USDT, USDC | 중앙기관이 예치된 USD와 1:1로 발행·소각 |
| 암호화폐 담보 기반 | DAI | 초과담보(ETH 등)와 이자율·청산 메커니즘 |
| 알고리즘 기반 | AMPL, ESD | 담보 없이 알고리즘으로 공급량 조절 |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앙기관에 대한 의존은 줄어들지만, 페그를 지탱하는 장치는 점점 더 정교한 설계와 시장 참여자들의 합리성에 기대게 된다. 이 중 중앙기관 없는 스테이블코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선구자가 바로 DAI다.
암호화폐 기반 — DAI & MakerDAO
이더리움을 입금하면 이를 보증금으로 잡아 LTV 최대 66%(혹은 담보비율 150%)를 적용하여 USD에 페깅된 스테이블코인인 DAI를 발행할 수 있다. DAI는 결국 이더리움을 보증금으로 하는 대출 플랫폼이다(현재는 BAT, 0x 등 더 다양한 코인을 보증금으로 쓸 수 있다). 그리고 DAI 생태계를 관리하는 DAO가 바로 MakerDAO다.
페그는 이자율로 조절한다. DAI가 $1 아래로 하락할 경우 이자율을 높여 대출 유저들에게 DAI를 상환하도록 유도하고, 유저들은 상환을 하기 위해 시장에서 DAI를 구매하며 상승압력을 가한다. 반대로 $1 위로 상승할 경우 이자율을 낮춰 DAI를 더 빌리게끔 유도하여 supply를 늘려 하방압력을 가하는 메커니즘을 사용 중이다.

나아가 담보가격이 하락하여 '담보 < 대출로 나간 DAI'가 되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ETH/DAI의 담보비율이 150% 이하로 하락하게 될 경우 담보물인 ETH를 매도하기 시작한다. 재단에서 직접 매도하는 방법은 중앙집권적이니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auction에 붙인다.
예를 들어 $2,000어치의 ETH를 예치하고 $1,000의 DAI를 빌렸다고 가정해보자. ETH 가격이 $1,400으로 하락하여 담보비율이 ETH/DAI = $1,400/$1,000 = 140%에 도달하여 150%를 하회할 경우 auction이 시작된다. 경매에는 DAI로 참여할 수 있다. 이때 프로토콜은 ETH를 팔아 '대차금액 + 이자 + 청산벌금 13%'를 회수하여 밸런스를 맞추는데, 이는 $1,000 + $20 + $133 = $1,153이다. auction에 참여하는 유저는 시가가 $1,400인 ETH를 $1,153에 싸게 살 수 있는 유인이 생기는 것이고, 프로토콜은 $1,153의 유동성을 확보하여 프로토콜 전체의 대차비율을 관리할 수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오늘날까지 성공적으로 DAI를 $1에 페깅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에 DAI는 이더리움 생태계 내 가장 오래된 서비스이자 가장 성공적인 use case이기도 하다.
이런 DAI에게도 허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MakerDAO가 DAO 커뮤니티 일원들의 인간성을 믿을 때이다.
코로나 쇼크로 인해 글로벌 금융시장이 폭락하며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이 50%에 가까운 하락을 보인 black swan이 있었다. 이더리움 가격은 $200에서 $95까지 하락했다. 이때 DAI의 주담보인 ETH의 폭락으로 담보비율 150%가 손상되며 다수의 청산과 auction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보통 같은 경우 청산되는 ETH가 많지 않아 auction 참여자들이 선의의 경쟁을 하며 합리적인 수준으로 ETH를 구매하고 프로토콜은 DAI를 돌려받았지만, 전무후무하게 많은 청산으로 인해 이런 선의의 경쟁이 일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무려 2–3시간 동안 한 auction 참가자는 0 DAI에 ETH를 지속적으로 낙찰받았으며, 이로 인해 DAI에는 570만 달러의 결손이 발생하였다. 당시 재단은 ETH 경매에 참여할 시 bidding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격을 설정해 놓지 않았었다. 정량적으로 작동하던 기계적 알고리즘에 '선의의 경쟁'이라는 시장논리를 투영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참사였다.
결과적으로 결손을 메우기 위해 최후의 수단이 사용되었다. 거버넌스 토큰인 MKR이 추가 발행되었고, 이를 시장에서 매도하여 해당 차익으로 결손을 메웠다. MKR의 총발행량은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담보구조조차도 위험하니, 아무것도 backing되어 있지 않은 스테이블코인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프로젝트가 있으니 바로 Ampleforth다.
알고리즘 기반 — AMPL & ESD
Ampleforth(AMPL)는 가장 대표적인 algorithmic stablecoin, 즉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이다. 기초자산이나 발행하는 기관이 없으며 그저 알고리즘에 의하여 $1의 페그가 유지되는데, 그 알고리즘은 굉장히 단순하다. $1 위일 경우 AMPL을 보유한 모든 지갑 내 AMPL 개수가 증가하여 공급량을 늘려 매도압력을 늘리고, $1 아래일 경우 모든 지갑 내 개수가 감소하여 공급량을 조절하여 수급을 맞춘다.


100 AMPL을 보유한 채로 잠들었는데 AMPL이 $1.50에 도달할 경우 다음날 아침 지갑 내 잔고가 105 AMPL로 증가하며, 반대로 $0.50에 도달할 경우 95 AMPL로 감소한다. 이는 시장 내 AMPL의 수요 대비 공급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AMPL에는 $1을 기준으로 공급량이 늘어나는 expansion, 유지되는 equilibrium, 그리고 축소되는 contraction의 3가지 state가 존재한다.
이를 통해 시장에 실제로 존재하는 수요와 알고리즘을 통해 조절된 공급량의 접점, 즉 equilibrium을 찾는 것이 본 메커니즘의 본질이다. 시장에 AMPL에 대한 1,000억원의 수요가 있는데 현재 AMPL 시총이 1,100억원이라면 자연스레 가격은 $1 아래로 하락할 것이다. 이어 contraction 메커니즘에 따라 AMPL의 발행량이 줄어들 것이고, 다시 가격은 $1로 회귀하되 수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시총은 1,000억원으로 맞춰지며 수요와 공급이 equilibrium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AMPL의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에 다수의 프로젝트가 영감을 받아 출사표를 던졌으니, 한때 이러한 rebase stablecoin들이 반짝 DeFi 시장 내 큰 점유율을 차지했다.

ESD — Empty Set Dollar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나타난 경쟁자 중 가장 눈에 띄는 프로젝트 중 하나가 바로 ESD였다. AMPL의 '모든 지갑의 수량을 늘리겠다'에서 한 단계 나아가, ESD 플랫폼에서 '쿠폰을 구매한 지갑들의 수량을 늘리겠다'로 메커니즘을 설정하였다.
쿠폰은 ESD가 $1 아래일 때만 매수 가능했고, 매수할 경우 매수한 ESD는 락업이 되었다. 시장의 공급량이 줄어들며 가격상승을 유도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쿠폰은 프로토콜이 발행하는 일종의 채권이었다. 페그가 무너졌을 때 유통량을 스스로 묶어두는 대가로, 페그가 회복되면 프리미엄이 붙은 신규발행 물량을 받는 구조다. 가격이 $1 위로 재차 상승하면 쿠폰을 매수한 유저들에게 일정 ESD를 신규발행해 줌으로써 발행량을 늘려 가격하락을 유도했다.

일부 쿠폰을 매수한 유저들만 신규발행된 ESD를 받을 수 있었으므로 그 수익은 일수익이 10~20%에 이르는 등 상당했다. 사람들은 충분히 쿠폰을 매수할 유인이 있었다. 이에 쿠폰을 사는 것은 유행이 되어 하락한 가격도 금방 상승했고, 수익을 본 유저들은 곧바로 ESD를 매도하며 돈을 인쇄하듯 벌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반복된 결과로 ESD의 공급량은 무섭게 늘어, 1주일 만에 500만 개에서 8,500만 개로 증가하였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ESD의 일시적인 락업으로 가격이 다시 $1 위로 회귀하는 것일 뿐, 발행량은 줄지 않고 계속 늘어나기만 한다. equilibrium이 맞는 것일까?
재단은 이러한 상황에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로 30일 동안 $1 위로 회귀하지 않으면 coupon 구매를 위해 락업된 ESD를 소각하는 것이었다. 이때 사람들은 coupon 구매를 통해 돈을 인쇄하는 것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락업된 물량은 상당했다. 그런데 어느 날, 30일이 가까워지도록 ESD가 $1을 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초조해졌다. 하루 10%를 벌 것이라고 기대했던 투자가 -100%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DAO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둘 제안하기 시작했다.
"30일 동안 $1을 넘지 못하더라도 소각하는 정책을 없애자."
투자금을 지키기에 급급했던 투자자들은 하나둘 동의했고 결국 해당 제안은 투표로 이어졌다. 그리고 결과는 99.99% 찬성이었다. DAO 투표 결과 99.99%의 유저가 해당 메커니즘을 없애는 데 찬성했다. 메커니즘은 곧 사라졌고, ESD는 일시적인 락업이 있을 뿐 공급량이 늘어나기만 하고 줄어들지는 않는 스테이블코인이 되었다.


모두의 ESD는 소각되지 않고 지켜졌지만, ESD의 가격만은 지켜지지 않았다. 작동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를지도 모를지도 모르는) 있는 정량적 수급조절 메커니즘이 DAO 구성원들의 사익과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무너지는 사례였다.
맺으며
"기계적 알고리즘과 인간적인 DAO의 조화는 건전한 DAO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더리움의 진정한 가치가 탈중앙화를 꿈꾸는 비전과 그 비전에 함께하는 커뮤니티에서 나오듯, 정량적인 요소들이 중요한 DeFi는 인간적인 DAO가 그 영역을 존중하는 선에서 진정한 가치가 발현된다고 생각한다.
정량적인 parameter들을 사람들 간의 합의로 임의로 변경하는 것은 분명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특히나 모두가 생각하는 방향이 다르고, 경제수학적인 배경 없이 인기투표식으로 결정되었을 때 혹은 사익이 걸려 있을 때 그 결과는 더 참담하다.
ESD의 사례는 커뮤니티 질의 중요도, 급하게 만들어진 DAO의 행동론, 그리고 DeFi의 정량적인 메커니즘에 인간적인 사심이 들어갔을 때의 결과를 면밀히 보여준다. DeFi가 앞으로도 성장하고 중앙화된 TradFi보다 집단지성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눈앞의 이익보다 장기적인 균형을 중시하는 DAO들의 성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ps. ESD의 소각기능을 없애는 proposal의 반대표 1,648표 중 999표는 당사에서 행사하였다.

건전한 DAO를 꿈꾸는 백두.
